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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anzo/HQ!! 글연성

[오이이와] 남자 신부 - 4

[오이이와] 남자 신부 - 4

 

 

 

 

오이카와의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자신을 배웅하는 이와이즈미에게 진한 키스를 선사하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받는 것도 좋았지만 마음을 담아 전하는 것 역시 행복한 일이었기에 아침부터 내내 싱글벙글인 채였다. 안 그래도 미남인 사람이 만면에 미소를 띈 상태로 다니니 병원의 분위기까지 덩달아 좋아졌다.

 

“오이카와 선생님 말이야,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기분 엄청 좋아 보이시지?”

“응. 사모님 때문인가?”

“사모님?”

 

한 간호사의 입에서 ‘사모님’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일을 하며 그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다른 간호사들까지 모두 작업을 중단했다. 뭐, 사모님? 언제 왔었는데?! 초미의 관심사가 된 사모님에 대해 열띤 공방이 시작되었다.

 

“어제 왔었대요. 그 왜, 신관 로비 양쪽에 엄청 긴 계단 있잖아요. 거기서 막 오이카와 선생님이 끌어안고 그랬대요.”

“안았다고? 그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네. 듣기로는 사모님이 병원에 왔다가 계단에서 다리를 다치셨다나, 어쨌다나. 아무튼 그게 속상해서 그러신 건지 완전 애틋한 게 장난 아니었대요.”


곳곳에서 꺄아아- 탄성이 터졌다. 자기 사람에게 충실하고 아껴 주는 남자라며 칭찬 릴레이가 이어지는 그 앞으로 쿠라하시가 지나갔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이야기를 하느라 자신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는 간호사들을 힐끔, 보고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일에만 집중하려고 해도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둥둥 떠다니며 괴롭히니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봤으면 좋겠는데. 헛된 소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이와이즈미가 병원에 방문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애타게 기다리는 이와이즈미는 생각보다 자주 병원에 들렀다. 다만, 타이밍이 맞지 않아 쿠라하시와 마주치지 않았을 뿐.


“이것 좀 봐.”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핸드폰을 오이카와에게 보여 주었다. 사무실에 앉아 환자 기록부를 살피던 오이카와가 살짝 고개를 들어 액정을 바라보곤, 픽- 웃었다.


“와, 맛층 성공했네. 완전히 맛키랑 판박이야.” 

“그러게. 마츠카와도 자기 안 닮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노래를 하더니.”


고등학교 동창인 마츠카와와 하나마키는 자신들의 2세가 태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아기의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대충 한번 보고 금세 서류로 시선을 돌린 오이카와와는 달리, 이와이즈미는 갓 태어난 아기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직 이렇다 할 정도로 예쁘지 않은 신생아일 뿐인데도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 소리가 없는 이와이즈미가 이상해 슬며시 고개를 든 오이카와는, 사진에 빠져 넋을 놓고 있는 이와이즈미를 발견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데도 예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 참으로 사랑스럽고 기특하게 느껴졌다.


“우리도 아이 가질까?”


가볍게 던져 본 말인데, 이와이즈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좋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거라 예상했던 오이카와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어라, 싫은 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어색하게 웃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와이즈미 곁으로 다가갔다.


“왜 그래? 싫어?”


곧바로 고개를 젓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와이즈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싫어할 줄 알았어.”


의외의 말에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 앞으로 얼굴을 내밀며 시선을 마주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난 완전 빨리 갖고 싶은데.”

“진짜?”

“당연하지. 너 닮은 아이면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어.”


널 닮아야지. 이와이즈미가 헛웃음을 지었다. 처음 관계를 가진 이후로 꾸준히 잠자리를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아이 소식은 없었다. 거기다 오이카와도 조르는 기색이 없어 별로 생각이 없다고 지레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먼저 말을 해주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아, 오이카와 씨가 더 노력해야겠네. 오늘부터 분발할게.”


바싹 붙어 앉아 이와이즈미의 허벅지를 슥- 문지르는 손길에 ‘저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오이카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보더니,


“앞으로 30분 정도는 시간이 될 것 같은데.” 


라며, 그윽한 눈으로 이와이즈미를 응시했다. 여기 네 사무실이거든? 정색하며 몸을 빼는 이와이즈미의 허리에 오이카와의 팔이 감겼다.


“네가 퇴근하자마자 나한테 달려왔잖아. 그때부터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일만 없었어도 아까 확 덮었을 거야.”


요즘 이와이즈미의 일과는 학교와 병원, 그리고 집이었다. 퇴근했다 하면 바로 오이카와를 만나러 병원으로 직행하니, 그런 이와이즈미가 예뻐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바쁜 날에는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헤어질 때도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모처럼 시간적 여유가 넘치는 날이다.


“나 이따가 수술 들어가야 돼. 잘하라고 파이팅 해줘야지.”

“그 파이팅을 왜 꼭 이런 식으로……읍!”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오이카와가 그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맞붙은 입술에서 서로를 탐하는 혀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토오루……, 라며 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것이 이 정도에서 끝낼 기세가 아니었다. 잠시 뒤 이와이즈미는 사무실 소파에 반쯤 엎드린 자세로 두 팔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뒤에서 치고 들어오는 힘에 온몸이 흔들렸고, 틀어막은 입에서는 야릇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흐읏, 핫, 으응-”


최대한으로 소리를 참으려는 이와이즈미를 보며 오이카와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마치 맛있는 먹잇감을 앞에 둔 것처럼 입맛을 다시며 피식- 웃기까지 했다. 벌써 한두 번 하는 관계가 아닌데도 할 때마다 부끄러워하는 이와이즈미가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병원이니 어떻게든 소리를 죽이려는 모습이 은근히 자극적이어서 허리를 흔드는 오이카와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퍽, 퍽,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야릇하면서도 후텁지근한 공기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이와이즈미의 안에 한껏 쏟아낸 오이카와는 무척이나 개운하고 가뿐한 얼굴이었고, 반대로 이와이즈미는 얕은 숨을 몰아쉬며 오이카와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힘들어?”


응, 조금. 대답하면서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정말로 조금 피곤한 것처럼 보이자 오이카와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시달렸을 텐데, 이른 저녁부터 한바탕 했으니 진이 빠졌을 터였다. 괜히 했나, 싶기도 했지만 이미 한 것을 무를 수도 없었다.


“미안. 내 생각만 했네.”

“괜찮아.”


그러면서 나도 좋았어, 라는 한마디를 덧붙여 주자 오이카와의 표정이 단번에 바뀌었다. 다시 시계를 본 오이카와가 쯧,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수술이라서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래, 어서 가. 나 먼저 집에 가 있을게.”

“알았어. 끝나면 바로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응.”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오이카와는 지금 해야 하는 수술이 몇 시간이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별 문제가 없다면 2시간, 뭔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면 얼마의 시간이 더 추가될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괜히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금방 갈 것처럼 말했다.


시간이 촉박한 오이카와가 먼저 사무실을 나섰고, 이와이즈미는 천천히 겉옷을 입고 들고 왔던 가방과 물건을 챙겨 일어났다. 그리고 막 문을 열었을 때, 그 앞에는 일전에 만난 적이 있는 의사가 서 있었다. 쿠라하시였다.




*




쿠라하시는 오이카와에게 결재를 받아야 하는 서류를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갈까, 말까. 어차피 급한 것도 아니었기에 괜히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다 하는 수 없이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와이즈미를 만난 이후로, 어쩐지 오이카와를 보는 것이 껄끄러워졌지만 그는 자신의 상사였고, 더불어 배워야 할 것도 많았다. 그렇게나 존경하고 우러러보던 우상이 불편해지다니, 쿠라하시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한숨을 내쉬며 오이카와의 사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얼굴을 확 찌푸렸다. 아, 괜히 일찍 왔네. 그러니까 날짜 거의 다 됐을 때 왔으면 좋았잖아, 쿠라하시! 멍청아. 스스로를 책망하며 돌아서려는데, 조금 크게 소리가 들렸다. 하앗, 읏, 하는 애닳는 목소리였다. 순간 무언가에 세게 얻어 맞은 듯 충격을 받았지만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


목소리는 아까 그 소리 이후로 더는 크게 들리지 않았지만, 귀를 대고 있으면 들릴락 말락하게 달뜬 신음이 가늘게 이어졌다. 안에서 행해지는 행위가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부터, 쿠라하시는 자신의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의 변화가 느껴지자 그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는 가장 가까운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급한 불부터 끄고 나왔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였다. 한 번 빼고 왔음에도 쿠라하시의 것은 자꾸만 일어나려 했다. 안에서 신음을 흘리던 이가 바로 자신의 마음을 빼앗아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내 아래서 울게 하고 싶다. 내 밑에 깔린 채 흔들리는 모습이 보고 싶다. 두려우면서도 짜릿한 상상이 쿠라하시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이와이즈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이카와는 쿠라하시가 화장실에 간 사이, 벌써 수술 준비를 위해 나간 후였다. 관계를 가진 뒤임을 보여 주듯 붉게 상기된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쿠라하시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아, 안녕하세요.”


이와이즈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쿠라하시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입도 벙긋 하지 못했으니까.


“네, 안녕하세요.”


서로 인사는 주고받았지만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쿠라하시의 시선이 불편해 이와이즈미는 꾸벅 목례를 하곤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움직인 쿠라하시의 손이 이와이즈미를 잡았다. 또 다시 허락 없이 몸에 닿는 타인의 손길에 이와이즈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기…….”

“이거, 놓고 말씀하시죠.”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와이즈미가 차갑게 그의 손을 쳐냈다. 굳이 잡고 말씀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쿠라하시는 확실하게 선을 긋는 이와이즈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아예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탄탄한 벽을 쌓아 놓은 채로 말하는 기분이라 영 불쾌했던 것이다. 사실 결혼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취할 수 있는 태도였지만 쿠라하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직장에서 이러시는 건 아니잖아요.”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울컥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눈치챈 이와이즈미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인 것처럼.


“밖에까지 소리 다 들리던데요?”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쿠라하시는 일부러 과장해서 말했다. 이와이즈미가 당황한 틈을 파고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와이즈미 하지메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와이즈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냐, 는 식으로 쿠라하시를 응시하며 픽- 웃었다.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생각할까요? 오이카와 선생님 이미지에도 좋지 않을 겁니다.”

“참 이상하네요.”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쿠라하시에게 이와이즈미가 능청스럽게 쏘아붙였다.


“토오루가 다른 사람이랑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 그게 이미지와 무슨 상관이 있죠? 물론 직장에서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보이는 공간에서 한 것도 아니잖아요.”


조목조목 따지는 말에 쿠라하시는 잠시 대답할 거리를 잃었지만, 곧 얼굴을 구기며 이와이즈미의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저한테 피해를 줬잖아요. 결재 받으러 왔다가 밖에서 다 들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책임져 주세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그는 이와이즈미를 벽으로 몰아세웠다.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짜증나게. 오이카와가 아닌 다른 이의 눈 아래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와이즈미에겐 불쾌한 일이었다.


“한 번 빼고 왔는데도 당신을 보니까 또 서네요. 오이카와 선생님께도 해 드리겠죠? 펠라 말이에요.”


한계까지 화가 치민 이와이즈미가 붙잡힌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아! 진짜 적당히 안 하면 너야말로 의사 생활 끝날 줄 알아!”

“끝날 땐 끝나더라도 당신 한 번만 맛 좀 보면 안 될까요?”


이런 씨발!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버둥거려 보아도 쿠라하시의 힘이 더 셌다. 쿠라하시는 이와이즈미를 억지로 끌고 자신이 갔던 화장실로 향했다. 이대로라면 그냥 끌려갈 것 같아 소리를 지르려던 이와이즈미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막무가내로 끌려가던 이와이즈미를 잡아 자신 쪽으로 당기더니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내가 끝내 줄게.”


분명 감정이 배제된 냉정한 목소리인데도 그 안에는 온갖 분노와 격분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걸음을 멈춘 쿠라하시가 움찔하며 뒤를 돌아다보았고, 그의 눈에는 푸른색 수술복 차림의 오이카와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너 아직도 얘가 누군지 몰라서 이따위로 들이대는 거냐?”

“……아, 아뇨. 지금 이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라…….”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이와이즈미는 기가 막혔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 거야? 이 쓰레기가!


“시끄러워. 넌 오늘 내 손에 죽는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오이카와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쿠라하시는 정면으로 맞은 주먹에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비틀거리며 어떻게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연이어 쏟아지는 주먹질에 완전히 속수무책이었다.


“토오루!”


번뜩 정신을 차린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만해, 그러다 죽겠어! 애타게 말리는 목소리에도 오이카와는 멈추지 않았다. 죽어도 돼. 그러라고 패는 거니까. 하지만 정말로 쿠라하시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오이카와에게도 큰 피해가 갈 일이었다. 이와이즈미는 필사적으로 오이카와를 감싸 안았다.


이제 됐어. 그만하면 충분해, 토오루. 그러니까 제발…….


애타는 목소리에 겨우 오이카와의 움직임이 그쳤다. 쿠라하시는 거의 반은 실신한 상태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들과 다른 의사들이 달려와 그를 살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말에도 오이카와는 입도 벙긋하지 않은 채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이와이즈미도 다른 변명 없이 죄송하다는 말만 남긴 뒤 서둘러 오이카와를 따라 사라졌다.


며칠 뒤, 쿠라하시는 다시 병원에 출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었지만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으니 알 방법이 없었다. 그저 쿠라하시 본인이 큰 잘못을 해 오이카와를 화나게 만들어 생긴 일이라고 말하며 알아서 굽히고 다녔다. 오이카와 입장에서는 아예 그를 쫓아내고 싶었지만 의사로서의 자질을 생각해 참으라는 이와이즈미의 조언에 따라 묵과하기로 했다.


물론, 쿠라하시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빌고 또 빌고. 두 사람을 찾아가 몇 번이고 잘못을 인정했다. 무슨 일이든 다 할 테니 제발 병원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달라는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참은 것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오이카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이와이즈가 크게 마음을 먹었다. 그 역시 처음엔 쿠라하시를 고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닥에 납작 엎드려 머리가 땅에 닿도록 비는 걸 보니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너무 물러 터졌잖아, 하지메.”


모처럼 쉬는 날. 오이카와는 거실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다 불현듯 쿠라하시 사건을 떠올리곤 금세 이마를 찌푸렸다. 아, 진짜 반 병신은 만들어 놨어야 하는 건데.


“대신에 너한테 좋은 부하가 하나 생겼으니 잘된 거 아니야?”


이와이즈미의 우스갯소리에 부하는 무슨, 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막 내린 따뜻한 커피 두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오이카와 옆에 바싹 앉은 이와이즈미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팔이 둘러졌다. 내가 만지는 것도 아까운데, 그딴 자식이 손을 댄 게 짜증나. 툴툴거리는 오이카와가 귀여워 이와이즈미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근데 너, 그때 수술이라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금방 온 거야?”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이카와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끝내 수술실로 돌아가지 않았고, 이와이즈미와 함께 집으로 왔다. 그럼 한다던 수술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수술하기 직전에 환자 상태가 나빠져서 미루게 됐어. 원래 엄청 드문 일인데 너한테 그런 일이 생길 줄 알고 그랬는지, 아무튼 타이밍이 기가 막혔지. 얼른 사무실 정리하고 나가면 너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서둘렀던 거였어.”


그랬구나. 만약 그때 오이카와의 수술 타이밍이 어긋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리는지 이와이즈미가 움찔, 몸을 떨었다.


“어쨌든 쿠라하시 그 자식, 이제부터 지옥이 뭔지 철저히 맛보게 해줄 거야.”

“뭘 하려고 그래?”

“글쎄. 내 밑에 있는 놈이니 부려먹어도 아무도 뭐라고 못 할 테지.”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오이카와의 쿠라하시 굴리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