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대륙 최강의 전사가 있는 곳. 가장 강대한 국가임과 동시에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설국(雪國)은, 황제 오이카와 토오루가 다스리는 나라다. 수많은 침략 전쟁에서 단 한 번의 패배도 없는, 그야말로 절대 강국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위대한 황제지만 잔인한 성품으로 공포 정치도 서슴지 않는다, 라는 것이 설국의 황제, 오이카와 토오루에 대한 소문이었다.
오이카와는 치렁치렁한 황제의 의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움직이거나 걸을 때 불편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때문에 중요한 자리가 아니면 되도록 간소하게 입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그가 오늘은 좋아하지도 않는 화려한 옷을 입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의자에 앉아 팔걸이에 턱을 괴자 소매가 주르르 흘러 새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오이카와는 매우 지루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 전 굴복시킨 수국(水國)에서 공물을 가지고 왔다는 소식에 일부러 행차했건만, 가지고 온 공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폐하, 저희 수국에서는 폐하께 드릴 공물과 함께 특별한 진상품을 가지고 왔나이다.”
특별한 진상품이라는 말에도 오이카와의 반응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관심 없다는 얼굴로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계속 바라만 보고 있자, 다급했던 수국의 사신은 부하를 향해 서둘러 눈짓을 했다. 빨리 그 애를 데려와, 라는 뜻으로. 잠시 후 긴 베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린 사람이 들어왔다. 그제야 오이카와의 눈빛에서 ‘흥미’가 보였다.
“공물이야 다른 나라에서도 항상 들어오고 있으니 별다를 것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희는 특별히 사람도 함께 준비했습니다.”
사람이라. 오이카와가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걸 가지고 왔군.
“베일을 벗겨라.”
사신의 명령에 부하 하나가 긴 베일을 벗기자 그 안에서 정갈한 옷차림의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왜소하지만 눈빛과 표정은 분명 살아 있었다. 때문에 위풍당당하면서도 올곧은 의지와 성품이 보이는 듯했다. 오이카와는 그 눈빛 하나에 이름도 모르는 남자에게 단번에 사로잡혔다.
“그가 누구인가.”
사신을 대하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젊은데다 곱상하고 잘생긴 황제라 자칫 가벼이 보았다가는 큰코다칠 것이다.’
사신은 수국의 왕인 제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처음 들었을 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지금 이 짧은 한 마디로 완벽하게 깨닫게 되었다. 결코 얕볼 수 없는 위엄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수국의 왕이신 제 아버지의 막내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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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즈미는 잔뜩 굳은 얼굴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형제 관계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냉랭하고 차가운 기운만이 방 안을 맴돌았다. 왕세자는 주변을 물리고 이와이즈미와 둘이서만 마주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냐.”
그의 물음에 이와이즈미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을 하지 않자 왕세자는 품에서 여러 번 접힌 서신을 꺼내 거칠게 탁자 위로 던졌다.
“이딴 것을 써서 보내라고 너를 설국에 두는 것이 아니다. 네가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마라. 아바마마가 네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신 기회다. 모르겠느냐?”
다그치는 말에도 이와이즈미는 입술만 달싹거릴 뿐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왕세자의 분노를 부추기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이와이즈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새 벙어리라도 된 것이냐? 왜 말이 없어!”
“혀, 형님…….”
“대답해! 왜 갑자기 계획대로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냐! 설국의 황제가 네게 잘해 주니 정이라도 들었느냐? 그래 봤자 우리나라를 침략한 폭군일 뿐이다. 그러니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내내 주눅이 들어 있던 이와이즈미가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짜냈다.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황제 폐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닥치지 못할까!”
왕세자는 거칠게 멱살을 놓으며 이와이즈미를 밀어 넘어뜨렸다. 그 바람에 의자에 앉아 있던 이와이즈미는 쿠당탕―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메가인 너에게 기껏 기회를 주었는데 이따위로 망치려 들어? 네가 그러고도 수국의 왕자라고 할 수 있느냐? 오메가 주제에……! 우리 왕실에서 오메가로 태어난 건 너 하나뿐이다. 왕자가 오메가라니, 수치스럽구나.”
이와이즈미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미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다.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을 정도로.
“내 다시 한 번 말할 테니 똑똑히 듣거라. 너는 황제의 눈에 들어 그의 아이를 가져야 한다.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해. 그래서 그가 우리 수국을 우습게 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네가 그를 좌지우지하는 것도 재미있겠구나. 알겠느냐? 네 임무는 황제의 아이를 낳는 것이다. 아들을 낳아 그의 곁에 머물면서 수국이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
“다시는 이딴 서신을 보내지 마라. 너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히더구나. 뭐? 황제 폐하를 배신할 수 없다고? 친구로 인정해 주셨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집어치워라. 한 번만 더 이런 서신 때문에 내가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면 너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실로 비정하고 몰인정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예상했었다. 그가 몰래 서신을 보냈을 때부터 이런 상황이 닥치리라 생각했다. 자신의 형이라면 불같이 화를 내며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내일 아침에 출발할 것이다. 그리고 누누이 말하지만 네가 내게 연락을 취해야 할 때는 황제의 아이를 가졌을 때와 아들을 낳았을 때 뿐이다. 기억하거라.”
방을 나서기 전, 왕세자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이 일은 네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목적이다. 오메가로서 인정받고 싶다면 반드시 성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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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뭐라 하였느냐? 오이카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이와이즈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깨끗했으며, 심지어 강인해 보이기까지 했다. 결코 허투루 한 소리가 아니라는 듯 진실함이 담긴 눈빛 그 자체였다.
“수국을 멸하여 달라 말씀드렸사옵니다.”
“하, 하지메…….”
“절대 농담도, 충동적으로 드리는 말씀도 아니옵니다.”
“허면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오이카와는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이와이즈미의 입에서 자신의 조국을 없애 달라는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금도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수국은 더 이상 미래가 없는 나라입니다. 자신들의 이득밖에 모르는 왕족으로부터 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득권 세력이 부패하였습니다. 작은 나라임에도 그동안 나름의 번영을 이루어 살았던 것은 전적으로 백성들의 노력과 비옥한 토지 덕분입니다. 제가 그곳에서 사는 동안에도 백성들은 크나큰 빈부 격차로 인해 고통을 받았었죠.”
“그런 것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일이다. 아무리 잘 다스려도 빈부의 격차는 있는 법.”
“그렇지요. 잘 알고 있사옵니다. 허나 폐하, 입은 은혜를 저버리고 도리어 원수로 갚으려 하는 자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질문을 하고서도 오이카와는 제발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답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감추고자 했던 진실을 이와이즈미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께서 폐하를 시해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독살하려 했다지요.”
“네가 어떻게…… 말하지 말라 일렀거늘, 대체 누가 말한 것이냐.”
이와이즈미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이 허탈해 보여 마음이 좋지 않았다.
“궁에는 수많은 입과 귀가 있지요. 아무리 덮으려 해도 결국 알게 되는 것이옵니다.”
자신의 형이 끝내 말도 안 되는,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벌이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와이즈미는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가장 분노했다. 이 격노한 감정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손끝이 파르르 떨렸고 눈 속에는 불꽃이 일렁였다. 마음 같아서는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며 칼을 빼들어 무엇이든 베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직 피어나지 못한 생명을 위해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가족이라고 믿었습니다. 비록 남들과는 많이 달랐지만, 그래도…… 유일한 가족이라 믿었는데 새로운 가족이 된 폐하를 시해하려 하다니요. 폐하께서 승하하시면 자신이 설국을 집어삼키려 했을 것이옵니다.”
“정녕…… 그것이 너의 소원이냐. 내가 수국을 멸하여도 괜찮겠느냐.”
위아래로 끄덕이는 작은 머리를, 오이카와가 감싸듯 쓰다듬었다. 그래, 그리하마. 어렵게 소원을 수락한 오이카와의 마음은 거대한 바위를 얹어 놓은 듯 무거웠다. 네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소원을 말했는지 나는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구나. 너를 통해 마지막까지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하였건만……. 끝내 이런 결과가 나오도록 만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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