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츠카와, 하나마키 둘 다 모델인 설정
- 의불 연성 주의
긴장된 공간 속에서 옷을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받는다. 언제나의 일상이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그가 있기 때문이다. 마츠카와 잇세이. 그는 현재 모델 업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스타이자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고작해야 데뷔 3년 차인 나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모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이상형임과 동시에 닮고 싶은 상대이기도 하다.
내가 모델로 데뷔하기 전부터 인기를 끌고 있었으니 말 다 했지. 나 역시 그를 모티브로 삼아 연습에 매진했으니까. 그런 동경의 대상이자 최고 스타인 마츠카와 잇세이와 공동 작업을 하게 되었다. 내게 이런 행운이 떨어지다니. 정말이지 어젯밤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메이크업이 거의 끝나갈 때쯤 스태프 하나가 와서 촬영 준비를 해달라고 말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나가자 나보다 앞서 촬영 중인 그를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주눅 드는 일 없이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포즈와 표정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의 촬영이 끝나면 나의 개인 촬영을 하고, 그 뒤에 둘이서 함께 촬영을 하게 된다. 생각만으로도 떨려서 죽을 것 같다.
같은 남자가 봐도 너무 멋지고 잘생겼으니까. 아무리 시선을 돌리려 해도 내 눈은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간다. 먼 훗날, 꼭 마츠카와 씨 같은 모델이 되어야지. 그렇게 다짐했다.
“오케이,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마츠카와 씨.”
감독님의 말에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스태프에게 일일이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건넸다.
“자, 다음. 하나마키 씨.”
“네.”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재빨리 현장으로 다가가는데, 그만 조명 선에 걸려 휘청이고 말았다. 아무래도 중심을 잃어 넘어질 것 같……!
“어이쿠. 조심해야지.”
허리에 감기는 낯선 느낌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설마 마츠카와 씨가 잡아 줄 줄이야. 그는 길고 곧은 팔을 뻗어 내 허리를 감쌌고, 그로 인해 일부러 차려 입은 수트를 버리지 않게 되었다. 마츠카와 씨는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씨익- 웃으며 유유히 대기실로 향했다. 민망함과 창피함이 몰려왔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카메라 앞에 섰다.
“자자, 오늘 촬영 콘셉트 알죠?”
“네.”
“가을 남자, 라는 느낌으로 촬영할 거니까 표정이나 자세에 좀 아련한 느낌이 나도록 부탁해요.”
아련한 느낌이라니. 그게 말이 쉽지 몸으로 표현이 된답니까? 하지만 모델 일이라는 게 늘 이렇다. 표정과 몸짓만으로 촬영 콘셉트의 분위기와 감성을 표현해야 하니, 매번 이런 애매한 주문을 받게 된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저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포즈 잡아 주세요.”
높은 의자에 걸터앉아 감독님이 요구하는 것을 드러내려 최선의 노력을 했지만 몇 번이고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이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이쯤되자 경험이 부족한 나는 그만 긴장하고 말았다. 생각하는 것처럼 잘 되지 않아 당황한 것이다.
“하나마키 씨, 지금 너무 긴장한 것 같은데. 괜찮으니까 표정 좀 풀고 자연스럽게 갑시다.”
그러니까 그게 잘 안 된다고요!
굳은 얼굴로 애써 옅은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여전히 감독의 요구에는 맞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대기실에 있던 마츠카와 씨가 슬며시 나오더니 촬영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보고 있으니 더 집중이 안 되었다. 당황하여 시선이 이리저리 분산되었고, 자세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 미치겠네. 어떡하지? 이러다 오늘 촬영 다 망치겠는데.
아련한 분위기는커녕 내 몸이 점점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망했구나, 하며 고개를 드는데 마츠카와 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그가 천천히 입술 끝을 밀어 올리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나를 향해 웃다니. 나를 보고 저렇게 멋지게 웃다니. 촬영 중인 것도 잊은 채 나는 아예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케이! 지금 아주 좋았어요. 하니까 되잖아요, 하나마키 씨.”
에? 무슨 소리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감독님을 바라보자, 그가 지금껏 본 중에 가장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좀 전에 표정, 완전 환상이었습니다. 분위기에 취해 먼 곳을 바라보는 느낌이었어요. 내가 생각한 콘셉트와 아주 딱 맞아떨어졌거든요.”
누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감독님은 연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처음엔 잔뜩 긴장하더니, 역시 프로는 프로네. 금방 표정 풀고 곧바로 그런 감정을 표현하다니. 캬, 다시 봤습니다. 하나마키 씨.”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감독님은 연속으로 촬영한 내 모습을 보여 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모니터에 나타난 내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건 마츠카와 씨와 눈이 마주쳤을 때다. 말하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봐도, 누군가를 향해 애틋한 마음을 쏟는 시선처럼 느껴졌다. 미쳤다, 미쳤어. 좀 전에 내가 이런 눈으로 마츠카와 씨를 봤단 말이야?
본의 아니게 마츠카와 씨의 도움(?)을 받아 개인 컷은 무사히 찍었지만, 혹시나 이상한 오해라도 했으면 어쩌지? 동성인 사람이 그런 눈으로 바라본다면 누구라도 기분 나쁠 거 아니야. 아, 젠장. 다음은 둘이서 같이 하는 촬영인데.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마츠카와 씨는 벌써 다음 촬영을 위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메이크업 수정도 마친 상태였다. 나는 새로 받은 옷을 들고 그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구석으로 향했다. 촬영장 한쪽에 임시로 만든 대기실이다 보니 달리 탈의실이 없었다. 어차피 오늘 촬영은 남자 모델 둘이서 하는 것이라 그런지 이런 쪽으론 더 신경을 안 쓴 것 같다. 하긴, 쇼를 할 땐 무대 뒤에서 그냥 막 벗고 갈아입기도 하니까.
선배인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대기실 한편으로 가 괜히 그를 한 번 살펴보았다. 물론 내겐 관심도 없다는 듯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으니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럴 때 빨리 갈아입자. 얼른 수트 재킷과 셔츠를 벗었다. 그리고 가을 감성에 맞는 니트를 집어 드는 순간,
“하나마키, 몸 좋네?”
생각지도 못한 대사가 귓가를 때렸다. 나는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상태여서 그가 어떤 눈으로 날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차마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 마츠카와 씨가 훨씬 좋죠.”
이럴 땐 상대를 더 높여 주는 것이 정석이기 때문에 서둘러 대답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너무도 예상 외의 것이었다.
“어라? 내 몸 본 적 있어?”
“네?”
“나 아직까진 하나마키 앞에서 벗은 적 없는 걸로 아는데.”
“아……, 네. 저기…….”
당황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냥, 같이 작업하는 게 처음이니 잘 모른다고 하면 될 것을. 아니면, 옷 위로 봐도 좋은 게 티가 나던데요? 하는 식으로 유연하게 넘기면 될 것을! 왜 바보 같이 어버버, 하고 있는 거냐고!
“하하하하. 농담인 게 뻔하잖아. 뭘 당황하고 그래?”
살짝 그를 향해 돌아서니, 그는 호통하게 웃으며 재미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민망해진 나는 얼른 니트를 입었다. 그런데 갈아입어야 하는 옷은 하나 더 있었다. 바지. 바지를 갈아입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마츠카와 씨 앞에서 벗는 게 창피하고 부끄러워졌다. 그동안 여러 동료들과 일하며 아무렇지 않게 훌렁훌렁 벗었었는데, 대체 왜 이 남자 앞에서는 그게 안 되는 건데?!
“안 입을 거야? 그 바지.”
마츠카와 씨는 놀리듯 내가 입어야 하는 바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가 입고 있는 바지와 비슷한 색의 것이었다.
“입을 겁니다.”
젠장.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당당하게 벗는 게 덜 창피할 거다. 괜히 우물쭈물하면 더 놀림감이 될 거라고. 나는 다시 그에게 등을 돌렸다. 어차피 이러고 있으면 얼굴도 안 보일 테니까, 그냥 벗자!
에라, 모르겠다. 정장 바지의 버클을 풀고 아래로 내렸다. 별다른 반응이 없기에 이번엔 그냥 넘어가나, 싶어 얼른 새 바지를 걸치는데 갑자기 허리 부근에 서늘한 감촉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너 허리 진짜 가늘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마츠카와 씨는 손가락으로 내 허리를 슥- 문질렀다. 맨살에 닿는 타인의 피부가 낯설어 움찔, 몸을 떨었다. 아니 언제 또 소리도 없이 온 거야?
“모델은 원래 좀 말라야 하잖아요.”
“그렇긴 하지. 근데 아까도 생각했지만 넌 너무 마른 것 같아.”
“아까요?”
“너 넘어질 때 내가 잡아 줬잖아.”
“아…….”
그러고 보니 그때도 마츠카와 씨의 팔이 내 허리를 감았었다.
“이 이상 마르지 않게 잘 챙겨 먹어.”
선배로서의 걱정인가?
“네. 감사합…….”
“그래야 나도 먹을 게 있지.”
“네?”
뭐라는 거지? 뭘 먹는다는 거야.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봤건만,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피식 웃었다.
“이거 잘 채워.”
아직 다 잠그지 않은 버클을 만지작거리며 말하는데, 자칫 잘못했으면 이상한 곳에 그의 손이 닿을 뻔했다. 젠장!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마츠카와 씨가 그럴 리가 없잖아. 이렇게 인기 많고 멀쩡한 사람이 무슨 남자한테……, 그것도 나 같은 사람한테 관심을 보이겠어?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하나마키!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클을 잠그고 지퍼를 올렸다. 어쩐지 날 만지는 손길이 평범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별다른 뜻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 괜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자. 마츠카와 씨는 톱 모델이야. 가만히 있어도 여자가 몰리고 인기가 절정인 사람이라고. 설령 남자를 좋아한다 해도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이 알아서 몰릴 텐데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일에나 집중하자.
그리고 드디어 나와 마츠카와 씨의 공동 촬영이 시작되었다.
' Written by. Sanzo > HQ!! 글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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