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이와] 너에게로 가는 길 - ① Written by. Sanzo
말도 안 돼.
이와이즈미가 속으로 내뱉은 말은 딱 이 한마디 뿐이었다.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상황 파악조차 잘 되지 않았다.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지만 아무리 봐도 테스트기의 선은 두 줄이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한 붉은색의 줄. 아무리 외면하고 모르는 척 해보아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분명하게 다가왔다.
결국 정확한 확인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 제발 아니길 빌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와이즈미의 바람은 공중에 흩날리듯 보란 듯이 사라졌다. 연배가 조금 있어 보이는 여의사가 이와이즈미의 상태와 초음파 사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임신 6주차시네요.”
기뻐해야 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이와이즈미는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의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임신 초기가 가장 중요하니까 무리하지 마시고, 무엇보다 스트레스는 받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안 그래도 지금 좀 예민해져 있으신 것 같은데.”
의사의 진단은 정확했다. 이와이즈미는 임신을 한 그 자체로 큰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었다. 아이가 생긴 것은 너무도 행복하고 축복 받은 일이다. 하지만 아빠가 없는 아이라면? 온전한 가정 안에서 키울 수 없는 아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와이즈미의 머릿속에 지난 일이 아련하게 스쳤다.
오이카와 토오루.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와이즈미의 연인이었던 사람의 이름이다. 어릴 적부터 함께한 소꿉친구이자 평생을 함께할 미래의 동반자라 여겼다. 정말이지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오래된 것과 익숙한 것, 그리고 당연한 것은 이들에게 있어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지만, 결혼을 생각하고 있던 시점에서는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말았다.
서로를 알고 지낸 시간이 길어서, 너무 잘 알아서, 그래서 잊고 있었던 부분들이 상처가 되고 만 것이었다. 정말로 사소한 일로 다투었고, 정말로 작은 말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켜켜이 쌓였던 서운함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터지자, 쉽게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오이카와는 홧김에 헤어지자는 말을 내뱉었고, 이와이즈미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곧바로 후회했다. 왜 그랬을까? 한 번만 참을 걸, 한 번만 더 생각하고 말할 걸. 하지만 우습게도 같잖은 자존심 싸움을 하다 사과할 타이밍을 놓쳤고, 결국 오늘까지 헤어짐은 지속되었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진성 알파인 오이카와와 오메가인 이와이즈미는 어린 시절부터 쭉 말해 왔었다. 어른이 되면 결혼하자고.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가 짝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여러 번 몸을 겹쳤다. 사귀어 온 시간이 긴 만큼. 학생일 때는 조심하고자 반드시 피임을 했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몇 번 정도 콘돔을 하지 않고 관계를 가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와이즈미에게 히트사이클이 오지 않은 기간이어서 임신을 피할 수 있었다.
“하아. 이 시점에서 임신이라니.”
이와이즈미가 슬며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
오이카와와 함께였다면, 아마도 뛸 듯이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곁에 없었고, 이와이즈미 역시 이것으로 오이카와를 억지로 붙잡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인기가 많은 오이카와니 분명 지금쯤이면 새로운 애인이 생겼을 것이라 확신했다. 고민을 거듭하며 집에 도착한 이와이즈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의 답은 똑같았다. 마음을 다잡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시청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나오자 어머니인 이와이즈미 여사가 활짝 웃으며 그를 맞았다. 오이카와와 헤어진 후 한동안 우울한 상태로 지내느라 가족과도 교류가 없었기에, 그가 먼저 다가오는 것이 반가웠던 것이다.
“하지메, 이리오렴. 마침 재미있는 방송이 하는데, 네 아버지도 좋아하시구나.”
티브이에서는 연신 무어라 말하며 깔깔 웃는 연예인들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와이즈미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그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어머니, 그게…….”
“그래. 말해 보렴.”
꿀꺽. 침을 삼킨 이와이즈미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용히 경청하던 이와이즈미 여사가 '임신'이라는 부분에서 움찔- 몸을 떨었다. 그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였다면 누구보다도 기뻐했을 그들인데, 아이의 아빠가 없는 상황이니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었다.
“토오루에게는 얘기했니?”
“아뇨. 말 안 할 겁니다. 그러니 어머니도, 아버지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냥 제가, 혼자서 키울게요. 부탁드립니다.”
“하지메…….”
이와이즈미 여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무척이나 결의에 가득 찬 눈으로 아들을 응시했다.
“그래, 알았다. 네가 그렇게 결심했으면 엄마도 도울게. 너 혼자 키우는 건 어려우니까 낳을 때까진 이 집에서 지내.”
사실 이와이즈미는 본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쪽에 직장을 잡아 겨우 자리를 잡고 안정을 취하는 중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오이카와와 헤어졌으니, 현재 살고 있는 그 집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일부러 장만한 집이었는데, 하며 속으로 혀를 찬 이와이즈미가 쓰게 웃었다. 취직까지 했으니 이제는 행복할 일만 남았다며, 결혼하기 전까지만 그 집에서 살다 식을 올리면 신혼집을 구할 생각이었다.
오이카와와 사귀는 것은 집안끼리도 모두 아는 일이었고, 결혼 이야기도 오고 가는 중이었으니 가정을 꾸리기까지 겨우 몇 걸음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래서 본가를 나와 따로 살기 시작한 것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집에 오이카와가 드나들면 편히 지내기 어렵고, 둘만의 시간을 충분히 보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는데.
프로 배구 선수인 오이카와의 특성 상 어차피 자주 들를 수는 없어도, 그래도 잠깐이라도 둘이서만 있는 시간을 마음껏 활용하고 싶었다. 이제는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바로 말하고. 엄마가 뭐든 해줄게.”
“네.”
그의 어머니는 인자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비록 헤어졌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항상 오이카와가 있었고, 언제라도 이와이즈미와 다시 만나기를 바랐다. 물론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임신까지 한 상황이니 더더욱 그러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와이즈미의 부탁도 있고, 괜히 부모가 섣불리 나섰다가 둘 사이를 더 망치게 될까 염려되어 그저 잠자코 있기로 했다.
-
몇 달의 시간이 더 흘렀다. 그 사이 오이카와는 무난하게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 시즌 역시 그가 속한 팀이 강력한 우승 후보였고, 만약 우승하게 된다면 2년 연속 우승을 거머쥐게 되는 것이었다. 그 때문이기도 하고, 또 워낙 개인적으로도 인기가 많아 주장이자 최고의 세터인 그를 칭송하는 말이 연일 기사로 터졌고, 수많은 인터뷰와 방송 출연이 예약되어 있었다. 그러나 늘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한 후의 오이카와는 공허할 뿐이었다.
프로 선수가 된 이후, 많은 고생 끝에 좋은 팀에 합류하게 되었고 선배 선수들도 많았지만 그 안에서 실력을 인정 받아 주장까지 맡게 된 그였다. 그가 주장이 된 지 고작 2년. 언제나 최고의 토스를 올렸고, 최상의 작전을 지시했다. 때문에 배구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뒤에는 언제나 이와이즈미가 있었다. 묵묵히 응원해 주고 기다려 준 그가.
만약 이대로 시즌이 종료된다면, 잠깐의 휴식 후 곧바로 다음 시즌을 위한 합숙에 들어갈 것이다. 그 뒤엔 다른 팀들과의 비공식 연습 경기를 갖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또 도쿄를 떠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와이즈미와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다.
결국 멀리서나마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겠다 싶어 무작정 이와이즈미의 회사로 찾아갔다. 하지만 오이카와를 알아보는 시민들이 많아 의외로 애를 먹었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팬부터 사인을 해달라는 팬까지. 덕분에 오이카와는 새삼 자신의 인기를 실감했다. 그리고 어느덧 이와이즈미가 다니는 회사 앞에 도달했다. 이곳에 입사가 확정된 날, 함께 울고 웃으며 밤새도록 축하했던 일이 떠올랐다.
“나올 때가 됐는데.”
하지만 시계를 봐가며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이와이즈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신입이라 초반부터 야근하나? 입사한지 고작 반년 조금 넘은 사원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조심스레 회사 안으로 들어간 오이카와는 1층 로비에 있는 데스크로 가서 이와이즈미에 대해 물었다.
“저, 이와이즈미 하지메 씨의 친구인데…….”
아직 말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데스크의 직원은 그를 알아봤다. 어머, 오이카와 선수! 눈에서 하트가 날아올 만큼 직원의 표정은 황홀해 보였다. 굳이 자신에 대한 설명을 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오이카와는 화사하게 웃으며 마저 질문했다. 총무부의 이와이즈미 씨, 사무실에 있나요?
내선으로 물어보겠다며 직원이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여직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 씨는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출근을 안 하셨다고 하네요.”
“……!”
놀랐지만, 오이카와는 침착한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한 뒤 건물을 빠져 나왔다. 그가 아는 이와이즈미는 웬만해서는 아프다고 빠질 사람이 아니다. 학창 시절에도 죽을 만큼 아프지 않으면 절대로 학교를 빠지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아파도 부활동까지 꾸역꾸역 하고 가던 그였다. 그런데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직장에 결근했다. 그것이 오이카와의 신경을 매우 곤두서게 만들었다.
대체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거야? 오이카와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이와이즈미의 집으로 향했다. 회사 근처에 있는 오피스텔 중 가장 전망이 좋고 가격이 합리적인 곳이었다. 이와이즈미와 그가 함께 가서 보고 결정한 곳이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벨을 눌러도 이와이즈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너무 아파서 나오지도 못할 지경인가 싶어 오이카와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이 집의 열쇠를 받기 전에 헤어지는 바람에 오이카와는 아무리 애가 타도 집 주인이 문을 열어 주기 전에는 도저히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진작에 열쇠를 주려 했지만 계속된 오이카와의 원정과 시즌 일정 소화로 인해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타이밍을 놓쳤고, 헤어졌다.
어떻게 하지? 문 앞에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왔다 갔다 하기를 수십 분. 그 때 누군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혹시라도 이와이즈미일까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여유롭게 열쇠를 꺼내 이와이즈미의 옆방 문에 꽂았다. 덜컥- 열리는 문 안으로 유유히 사라지던 남자가 살짝 얼굴을 내밀어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저기, 그 방 주인 만나러 오셨어요?”
무언가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남자를 향해 오이카와가 빠르게 머리를 끄덕였다.
“에이, 헛걸음 하셨네. 거기 주인, 본가로 간다고 짐 싸서 나갔어요. 간지 좀 됐는데.”
“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오이카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완전히 나간 건 아닌 것 같고, 물어보니까 당분간만 가 있을 거라던데. 뭐라더라? 몸이 안 좋아서 그렇댔나? 아무튼 그래서 지금 그 방 비어 있…… 에? 어디 가요?”
남자의 말에 채 끝나기도 전에 오이카와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내달렸다. 조금 전 남자가 타고 온 그대로 머물러 있었기에 버튼을 누르자 바로 열렸다. 1을 누른 뒤,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오늘 몸이 안 좋아 회사를 쉬었다. 게다가 혼자 사는 방은 아예 한참 전부터 비어 있었다고? 도대체 뭐야? 하지메, 너…… 어디가 많이 아프기라도 한 거야?
아무리 마음을 다스려 보려 해도,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손끝이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헤어진지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다. 아니, 1년이 아니라 몇 년이 지났다 해도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를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직도 너무 애틋해서 미칠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아프단다. 그것도 얼마나 심각하게 아픈지 회사도 빠지고 혼자 살던 방에서도 나갔다.
지하철에 올라 이와이즈미의 본가로 향하는 내내, 오이카와는 온갖 생각들로 심정이 복잡해졌다. 좋은 쪽으로 마음을 먹으려 해도 자꾸만 안 좋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심각한 병이라고 하면 어떡하지? 얼마 못 산다고 하면 어떡하지?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야겠다.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목적지 역에서 내리자마자 쏜살같이 달렸다. 현역 운동 선수의 달리기 실력은 과연 대단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와이즈미 집 현관문 앞에 선 오이카와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벨을 눌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번에도 역시 이와이즈미는 쉽게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본가에도 없는 거라면 어디지? 설마, 병원인가? 이미 패닉 상태인 오이카와가 무작정 주변 병원을 뒤지려 막 몸을 돌리는 순간, 철컥- 하며 문이 열렸다.
“누구세…… 토, 토오루?”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2층에서 내려온 이와이즈미가 뒤늦게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새파랗게 질린 오이카와의 얼굴이었다.
“이와쨩! 하지메!!”
같은 사람 이름을 두 가지로 부르며 달려드는 그의 행동을, 이와이즈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이곳에 있는 것부터가 이해 불가의 일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헤어진 덕분에 양가 부모의 교류가 뜸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계속 연락은 하고 지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까지 이렇게 만날 상황은 아니었다.
자신을 안은 채 덜덜 떠는 오이카와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밖에 세워 둘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이긴 했지만, 무슨 일인지 도통 말이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마실 거라도 내오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어 주스를 꺼낸 뒤 컵에 따르며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맨날 티브이나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 잘 봐, 아가야. 저 사람이 네 아빠야.”
부엌 안에서 오이카와의 모습을 훔쳐 보며 아기에게 아빠가 누구인지 가르쳐 준 이와이즈미는, 다음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쟁반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이 순간, 부모님이 모두 집을 비우신 상태라는 게 무척이나 유감스럽게 느껴졌다. 오이카와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오랜만이기도 하고, 임신한 것을 숨겨야 하니 여러 가지로 불안했던 것이다.
“일단 이것 좀 마시고 진정해.”
주스를 내려놓자 오이카와가 천천히 잔을 들었다.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부쩍 수척해진 그의 얼굴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가 무슨 큰 병에라도 걸렸을까 걱정되어 눈에 뵈는 것이 없었는데, 집 안으로 들어서며 너무도 놀라운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메.”
“어.”
대화는 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소파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커다란 쿠션을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그 동작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본 오이카와가 조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야?”
앞뒤 없이 그저 누구냐고 묻는 말에 이와이즈미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그러다 이어지는 질문을 듣고 나서야 그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 애, 누구 애냐고.”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과 심상치 않은 태도에 정신이 쏠려 잠시 느슨하게 굴었다. 뒤늦게 쿠션으로 가려 보았지만 불룩 나온 배는 이미 오이카와의 눈에 든 뒤였다.
“대답해. 누구 애야.”
너다, 너. 목구멍까지 목소리가 올라왔지만 이와이즈미는 꾹꾹 눌러 참았다. 이제와 그의 발목을 잡을 순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누구 애인지 궁금해할 거 없어. 말해도 모르니까. 아, 그리고 나 곧 결혼할…….”
“하지메!”
“소리 지르지 마. 나 임산부야.”
“너 어떻게……. 나하고 헤어진 다음에 곧바로 다른 남자를 만난 거야?”
어쩐지 크게 배신을 당한 기분이 들어 오이카와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헤어진 후, 그가 누굴 만나든 상관할 수 없었지만 오이카와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자신과 이와이즈미가 짝이라는 생각이 강했기에 괜스레 배신감이 들었다. 나는 널 그리워했는데, 너는 아니었던 거야?
“나한테 그런 거 따질 자격 없지 않아?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너야.”
침착하게 대응하는 이와이즈미와는 달리, 오이카와는 너무도 흥분해 있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이와이즈미를 보고 있는 지금의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와쨩,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고, 옅은 물기까지 어렸다. 이와이즈미는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고개 숙인 오이카와의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미안해, 토오루. 미안해. 하지만 나는, 네가 감정에 휘말려 일을 그르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날 사랑하지 않는데, 아이 때문에 억지로 눌러앉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 오이카와의 모습은, 혼란과 놀람, 그리고 충격에 의해 잠시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성을 되찾는다면, 아이와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래서 더욱 매몰차게 부정했다.
“왜? 옛날부터 너만 인기 있었으니까, 나 같은 건 계속 혼자일 줄 알았어?”
“…….”
“의외로 나 좋다는 사람 많더라. 애 아빠가 누군지 궁금하다고 했지? 들어도 모르겠지만 가르쳐 줄게. 아빠는…….”
“너야, 토오루.”
!!!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시선이 동시에 현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언제 들어온 것인지, 이와이즈미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장을 보러 나갔던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오도록 모른 채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둘을 발견했고, 본의 아니게 듣게 된 대화의 흐름이 엇나가고 있음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래서 바로잡아 주어야겠다고 판단해 끼어든 것이다.
“어머니…… 방금,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오이카와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누가, 아빠라고?
“하지메가 가진 아이의 아빠가 너라고 했다, 토오루. 네가 아빠야.”
“지, 지금 무슨 말씀을……. 아니야! 너 아니야, 토오루.”
뒤늦게 이와이즈미가 수습해 보려 했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늦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예 짐 꾸러미를 내려놓고 소파의 빈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차분하고 고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메, 이제 그만하자. 토오루가 직접 와서 묻고 있잖니. 계속 몰랐더라면 나도 말하지 않았겠지만, 이렇게 와서 묻는다면 사실을 말해 줘야지. 아이 아빠잖아.”
“하지만 저랑 토오루는 이미…….”
“너희 둘, 정말로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 거니? 더 이상 서로에게 마음이 없어? 정말 그래? 그런 거라면 나도 더는 말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가 볼 땐 아닌 것 같아. 여전히 사랑하고 서로를 아끼고 있잖아. 그러니 이제 그만하자. 알았지?”
그리고는 충분한 대화를 나누라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다시 둘만 남게 된 거실에는 정적만 흘렀다. 결국 이와이즈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짓말한 건 미안해. 하지만 정말로 아이 때문에 고민할 필요 없어.”
“어째서?”
“그냥 내가 키울게. 너한테 짐이 되지 않게…….”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지메?”
“어, 어?”
오이카와가 눈가에 맺힌 물방울을 슥 닦으며 예의 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와이즈미가 좋아하는, 시원하고 화사한 웃음.
“내가 지금 얼마나 기쁜지 알아? 아이 덕분에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게 됐잖아. 그동안 몇 번이고 찾아가서 사과하고 싶었어. 근데 용기가 안 나더라. 참 못났지.”
이와이즈미는 씁쓸하게 웃으며 스스로를 질책하는 오이카와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마찬가지야. 처음엔 자존심 때문에, 그 다음엔 시간이 훌쩍 흘러서, 이제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말 못했어.”
오이카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와이즈미의 곁으로 갔다. 실로 오랜만에 품에 안아보는 이와이즈미였다. 여전히 쏙 들어오는 느낌에,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
“몇 개월 된 거야?”
“한 5개월쯤?”
“5개월이면, 우리 헤어지기 얼마 전엔 한 그 때?”
“아마도.”
“너 그 때 약 먹었었잖아.”
관계를 가질 당시, 이와이즈미는 히트사이클이 온 때였다. 미리 약을 복용했으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해 피임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약이 제 몫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랬지. 근데 안 들었나 봐.”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를 더욱 당겨 안았다.
“다행이다. 이번처럼 약효가 없었던 게 다행인 적은 처음이야.”
그러면서 살짝 이와이즈미의 배를 만져 보았다. 늘 평평하고 탄탄했던 배가 불룩 나와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우리 아기, 움직여?”
“응. 태동이 활발한 때라 엄청 움직여.”
“진짜?”
오이카와는 재빨리 배에 귀를 대보았다. 과연, 이리저리 힘차게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 아이가 자신과 이와이즈미의 아이라니. 상상 이상으로 기쁘고 행복했다. 팀이 우승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태명은 있어?”
“……아직.”
혼자서 고민해 보았지만, 끝내 짓지 못한 태명. 이와이즈미가 아이에게 미안한 듯 겸연쩍게 웃었다. 그러자 오이카와가 그런 이와이즈미의 이마에 살며시 입술을 부딪친 뒤 말했다.
“봄봄이 어때?”
“봄봄이?”
“응. 우리 아기 봄에 태어날 거잖아. 지금 5개월이라며? 그럼 내년 4월에 낳는 거 아니야?”
“맞아. 그 때가 예정일이야.”
오이카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와이즈미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봄봄아, 아빠야. 그동안 엄마랑만 있어서 심심했지? 이제부터는 아빠도 같이 있어 줄게.”
이와이즈미는 알 수 없는 벅찬 감격에 입술이 떨렸다. 아이에게 ‘오이카와’라는 성을 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데 이제는 당당하게 오이카와가(家)의 일원이라 말할 수 있었다.
“봄봄이 태어나고 너 몸 좀 추스르면, 그 때 결혼하자.”
반지도 없고, 멋진 분위기의 레스토랑도 아니었지만 이와이즈미에게 있어서는 세상 가장 멋진 프러포즈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자 그제서야 오이카와의 입술에도 같은 미소가 번졌다.
내년 봄,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더 이상 둘이 아닌 셋이서 함께 이 행복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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