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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anzo/HQ!! 글연성

[보쿠아카] 우리 사이의 거리 - 1

[보쿠아카] 우리 사이의 거리 - 1




보쿠토 코타로 X 아카아시 케이지


우리 사이의 거리


 Written by. Sanzo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때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나는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때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재회했다. 내 첫사랑이자 지금까지도 잊지 못해 마음에서 떠나 보내지 못한 사람, 보쿠토 씨였다.

 

 

 

 

 

 

 

 

평소 야근이 거의 없는 회사에서 그날따라 야근을 했다.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급하게 일을 마무리하고 무거운 걸음을 옮기다 충동적으로 편의점에 들어갔다. 원래는 집에 가서 뭔가 만들어 먹을 생각이었는데, 이도 저도 다 귀찮아졌다. 그래서 편의점 도시락이나 먹어야겠다, 싶었다. 몇 개 되지도 않는 도시락 종류를 꼼꼼히 살피며 하나를 집어 드는데,

 

“아, 아카아시?”

 

누군가 알은체를 했다. 그리고 무심코 돌아본 곳에는 놀랍게도 보쿠토 씨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초코 우유 하나와 달콤한 맛이 일품인 쿠키가 들려 있었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그와 똑 닮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꿈인가? 그렇게 치부하기엔 리얼리티가 너무 강하다. 바로 코앞에 서 있으니까. 편안하게 인사하면 될 것을,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보쿠토 씨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아카아시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네, 맞아요. 겨우 한 마디 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대답하기 어려운 걸까.

 

“진짜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저야 뭐. 대충 대답했음에도 보쿠토 씨는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이 상황이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겠는 나와는 달리, 그는 고향 친구라도 만난 듯한 반응이다. 이 사람이 반갑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해 청승을 떨게 만드는 사람인데.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아, 빨리 가서 밥이나 먹어야겠다. 

 

“그럼 전 이만.”

 

꾸벅, 고개를 숙이고 곁을 스쳐 지나가려는데 그가 나를 잡았다. 잠깐만, 아카아시. 어쩌면 나는 이 상황을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대로 가면 보쿠토 씨가 반드시 나를 불러 세울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심히 지나치려 했다. 그가 알아서 잡아 주길 바라며. 나도 참 어지간하다.

 

“네.”

“혹시 지금부터 저녁 먹으려는 거야?”

“네. 퇴근이 늦어져서요.”

“잘됐다. 같이 먹을래?”

 

뭐가, 잘됐다는 거지? 내겐 하나도 그렇지 않다. 이미 다른 이의 사람이 되어 버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해 사랑하고 있는 이 사람과 저녁을 먹어야 한다고? 미안하지만 사양이다. 그럴 수 없어.

 

“아뇨. 피곤해서 빨리 쉬고 싶습니다.”

 

아, 그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짙게 묻어 났지만 모르는 척했다. 나는 힐끔- 아이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보쿠토 씨가 결혼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때 나는 회사를 쉴 정도로 며칠을 꼬박 앓았다. 아마 살면서 제일 아팠던 때인 것 같다.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절대 밖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좋아도 싫어도 언제나 같은 표정. 그래서 생긴 별명이 ‘조각’이다. 좋은 의미에서의 조각이 아니라(보통은 조각 미남이라고 할 때 쓰니까) 딱딱하게 굳어 일말의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거다.

 

뭐,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나는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니까. 도망치듯 편의점을 나왔다. 그리고 걸음을 서둘러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이 노선을 타는 게 아직은 어색하다. 바로 며칠 전에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뭔가 변화를 주고 싶어 회사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방을 얻었다. 여러 세대가 사는 빌라인데, 꽤 괜찮은 곳이다. 그래 봤자 고작 삼사일 정도 지낸 게 다지만.

 

그런데…… 왜 새로 이사 온 빌라에서, 그것도 바로 옆집에서 보쿠토 씨와 다시 만나야 하는 거지? 놀람과 당황한 빛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자 보쿠토 씨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아카아시랑 같은 지하철 타고 같은 역에서 내렸는데, 여기까지 오도록 모르더라.”

 

웃음에 어쩐지 서운한 기색이 느껴진다. 

 

“그랬, 습니까? 급하게 오느라 전혀 몰랐네요.”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편의점에서부터 집으로 올 때까지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가장 안전한 장소인 집에 가서 오늘의 일을 잊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잊고 싶은 원흉이 바로 뒤에 따라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거기 새로 이사 왔다더니 아카아시였구나. 나 며칠 출장 갔다 온 사이에 이사한 모양이네.”

 

맙소사. 기껏 새롭게 시작하고자 이사한 곳이 보쿠토 씨 옆집이라니. 우연치고는 너무한 게 아닐까 싶다.

 

“널 부를까도 생각했는데, 너무 급하게 가는 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안 불렀어.”

 

당신 때문입니다.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끝내 말하지 못하겠지. 그럼 들어가세요. 형식적인 인사를 남기고 열쇠로 문을 따는데, 보쿠토 씨가 다급하게 내 팔을 잡았다.

 

“아카아시! 역시…… 저녁 같이 먹지 않을래?”

 

더는 거절하기 어려웠다. 하필이면 바로 옆집이라 피곤하다는 이유로 거절하기에는 상황이 적절하지 않았다. 밥을 먹고 바로 나와 내 방으로 가면 되니까.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꺼냈던 열쇠를 가방에 넣었다. 각자 산 도시락을 꺼내는데, 아이가 물을 달라고 말하자 보쿠토 씨가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집 구조는 내 방과 같았다. 방 두 칸에 거실 겸 부엌으로 쓰는 공간과 화장실 하나. 작지만 아담한 베란다도 있다.

 

“나는 보쿠토 유타로야.”

 

묻지 않았는데도 아이는 알아서 자기소개를 했다. 유치원에서 배웠거나 보쿠토 씨가 말해 줬겠지. 처음 보는 사람에겐 그래야 한다고.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이럴 땐, 융통성이 없는 내 성격이 좀 답답하다. 아이에게는 좀 더 부드럽게 말해도 좋으련만.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고 말았다. 딱딱하다 못해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로 말할 건 없었잖아. 하지만 다행히도 아이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아까, 아시? 발음, 어려워.”

 

하나씩 끊어가며 읽는 것이, 확실히 좀 어려운가 보다.

 

“그럼 케이지라고 불러.”

 

어느새 다가온 보쿠토 씨가 아이 앞에 물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게 더 발음하기 쉽지? 동의를 구하자 아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다.

 

“케이지! 케이지! 이건 쉬워.”

“자, 물 마셔.”

“응. 아! 케이지도 유타로라고 불러도 돼.”

 

자신의 이름을 불러도 좋다며, 마치 큰 인심을 쓰는 것처럼 말하는 게 귀엽다. 식탁에 모여 앉아 도시락을 열었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라 기분이 이상하다.

 

“와, 누구랑 같이 밥 먹는 게 오랜만이라 괜히 떨리네.”

 

순간 내 마음을 읽은 줄 알았다. 보쿠토 씨까지 똑같이 말할 줄이야. 그런데 뭐라고? 누구랑 같이 밥 먹는 게 오랜만이라니. 매일 아내가…… 그러고 보니 유타로의 엄마는 어디 있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그런 내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보쿠토 씨가 소리 없이 입술만 벙긋거렸다. 나 이혼했어.

 

그가 결혼했다는 말 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이혼을 했다고? 아직 애가 이렇게 어린데? 벌써?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유타로가 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다. 유타로가 올해 다섯 살이라는 것과 우주 비행사가 되는 게 꿈이라는 것. 의외로 시금치나 당근을 잘 먹는다는 것. 그리고 보쿠토 씨는 여전히 생선 살을 잘 바르지 못한다는 것 등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밥을 먹으러 간 곳에서 반찬으로 생선이 나오면 늘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내가 다 발라 줘야 했었지.

 

배불리 양껏 먹었는지 유타로는 티브이를 보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방에다 아이를 눕히고 나온 보쿠토 씨가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냈다. 마실래?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밥만 먹고 바로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막상 또 이렇게 되니 엉덩이가 떨어지질 않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욕심이 생긴다.

 

“아카아시는 하나도 안 변했네.”

“보쿠토 씨도 그대로이신데요.”

“에, 거짓말. 나 이제 완전 아저씨 됐잖아.”

“뭐, 아이 아빠는 맞죠.”

“아카아시, 여전히 가차 없어.”

 

그러면서 칙- 소리가 나게 캔을 열고는 벌컥벌컥 마신다. 나도 조용히 한 모금 마셨다. 설마 보쿠토 씨와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데다 이렇게 한자리에서 밥을 먹고 맥주를 마시는 날이 오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아니, 예전에는 꿈꾼 적이 있었다. 적어도 이 사람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때는 혼자만의 꿈이라도 좋으니 실컷 꾸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결혼 소식을 들은 후에는 상상하는 것을 멈췄다. 꿈에서조차 이루질 수 없다고 단념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카아시는 애인 없어?”

 

흔하디 흔한 질문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질문이기도 하고. 친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들을 수도, 또 할 수도 있는 질문이지.

 

“없습니다. 있다면 여기에서 보쿠토 씨와 이러고 있지 않았겠죠.”

“하긴.”

 

왜 이혼했느냐고 묻고 싶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설령 이혼했다고 해도,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실은 말이야. 나 진짜 힘들었어.”

 

보쿠토 씨로서는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빨리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아니, 결혼 자체를, 그렇게…… 아무튼,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야.

“네?”

 

귀를 의심했다. 원해서 한 게 아니라고? 그럼 뭔데? 무슨 협박이라도 당했나? 조금 당황한 얼굴로 묻자 그가 겸연쩍은 듯 살짝 시선을 피했다.

 

“그게,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너무 기뻤어. 사회생활에 첫 발을 내딛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게다가 취업하기도 어려운 시기에 대기업에 덜컥 합격했으니 얼마나 좋았겠어?”

 

하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나 역시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을 때 무척 안심했으니까. 비록 보쿠토 씨가 다니는 대기업 정도는 아니지만, 중소기업 중에서는 꽤나 입지가 탄탄한 회사다.

 

“그래서 합격한 기념으로 친구들하고 만나서 술을 엄청 마셨어. 뭐, 거의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셨으니 말 다했지. 그러고 나서 아침에 눈을 떴는데 모텔이더라. 내 옆엔 모르는 여자가 자고 있고. 아마도 친구들이 부른 술집 여자 중 하나였던 것 같아.”

 

……설마. 뭔가 대충 예상이 되었지만 일단 그의 말을 끝까지 듣기로 했다.

 

“그 다음은 다 알겠지만, 그 여자가 임신을 했고 날 찾아왔어. 처음엔 내 아이라는 걸 믿을 수 없어서 결혼을 미뤘는데, 태어나고 보니 맞더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거야.”

 

예상대로다. 뭐, 여기까진 그렇다 치고. 왜 이혼을 한 거지? 아이까지 있는데.

 

“근데 유타로까지 있는데 왜…….”

 

이혼을 했나요? 라는 말은 뺐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테니까. 역시나 보쿠토 씨는 내가 뭘 묻는지 바로 알아챘다.

 

“애를 낳은 후에 결혼하긴 했지만 그래도 난 기왕 이렇게 된 거 어떻게 해서든 살아 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하겠더라. 뭐, 결혼 전부터 좋은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그 여자도 어쩌다 생긴 아이지만 지울 수 없어서 나랑 결혼하긴 한 건데, 서로 애정이 없으니 관계가 잘 유지될 리가 없잖아. 유타로를 낳고 오래지 않아서 바로 나가 버렸어.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같이 산 시간은 1년도 안 되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좋으나 싫으나 자기가 낳은 아이인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가다니.

 

“많이, 힘드셨겠네요.”

 

이런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위로밖에 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지만, 이것 말고 달리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어?

 

“하아, 말도 마. 갓난아기를 가까이서 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혼자서 키워야 했으니 난리도 아니었지. 말도 안 되는 실수도 여러 번 했고. 그러는 와중에 이혼했어.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해. 유타로에겐 미안하지만 그런 여자를 엄마로 두느니 그냥 나 혼자 키우는 게 나을 것 같거든.” 

 

나는 보쿠토 씨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과 좌절에 빠져 한동안 앓아 눕기까지 했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내가 없는 시간을 사는 그가 밉고 원망스럽기까지 했는데, 그 안에 이런 진실이 감춰져 있었을 줄이야. 다른 의미로 충격이다.

 

“아아, 말하고 나니 시원하다. 솔직히 나 이렇게 결혼한 거 아무도 모르거든. 가족들 말고는. 이혼한 거 아는 애들도 거의 없을 걸?”

“그랬군요.”

“너한테는 말하고 싶었어. 우린 예전부터 친했고, 넌 내 최고의 파트너였으니까.”

 

파트너. 제일 편하고 가까운 사람이지만 그래도 내 위치는 파트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따름이니까. 아무리 남자끼리의 결혼이 가능하고 아이도 가질 수 있다지만 보쿠토 씨에게 있어 나는 그저 친한 후배이자 최고의 파트너일 뿐이다. 그러니 이 사람과 내가 함께하는 날은 오지 않겠지.

 

맥주 캔을 반쯤 비웠을 때, 보쿠토 씨는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얼굴로 나를 보았는데, 그 얼굴이 조금 난감해 보이기도 했다.

 

“저기, 아카아시. 너 내일도 오늘처럼 늦게 끝나?”

“회사… 말입니까? 아뇨, 내일은 정시에 퇴근합니다. 이렇게 야근하는 날은 극히 드물어요.

“그래? 다행이다!”

 

갑자기 화색이 도는 게 영 불안하다.

 

“그럼 나 부탁 하나만 좀 해도 될까?”

“무슨…….”

“내일 유타로 좀 데리러 가 줄 수 있어? 우리 회사는 야근이 잦아서 제 시간에 데리러 갈 수가 없거든. 게다가 난 가끔 출장도 가야 하고.”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동안 출장 가실 땐 대체 유타로를 어디에 맡기고 가신 겁니까?

 

나도 모르게 조금 추궁하듯 물었다. 혼자서 그를 기다렸을 유타로를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안 좋아진 탓이다. 그 어린 게 뭘 안다고…….

 

“우리 본가에 맡겼어. 어머니가 봐주시긴 했는데…….”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본가와는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는 그의 집에 놀러 가면 어머니께서 과자를 만들어 주시거나 파이를 구워 주시기도 했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니, 오히려 관계가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부모님하고 좀 안 좋아졌거든. 뭐, 어떤 부모가 좋아하겠어? 하룻밤 잔 여자랑 결혼을 했는데. 거기다 애까지 생겼으니 당연히 실망하셨겠지. 이어서 이혼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완전 불효의 극치잖아, 나.”

 

그래, 이해한다. 보쿠토 씨의 부모님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기뻐할 일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나는 문득, 번뜩이는 아이디어라도 떠오른 사람처럼 가슴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지금이 기회야! 어서 잡아! 하는 외침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게 약한 모습을 보인 그 틈을 파고들고 싶어졌다.  

 

“보쿠토 씨만 괜찮으시다면, 앞으로 유치원에 데리러 가는 일이나 출장이 있을 땐 제가 유타로를 맡아도 될까요?”

“어, 어? 그래도 되겠어?”

“집도 가깝고, 모르는 사람도 아니니 부탁하기 어려운 부모님 댁으로 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나야 완전 좋지! 근데 정말 괜찮아? 아카아시도 누굴 만나거나 하려면 유타로가 있는 게 불편할 텐데.”

“괜찮습니다.”

 

만날 사람이 없어서요. 당신 말고는. 그래, 나는 아이를 구실로 삼아 조금이라도 더, 한 번이라도 더 당신 얼굴이 보고 싶은 겁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서먹한 이웃 주민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유타로가 좋다고 할지 모르겠네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라 낯설어 할지도 모르고요.”

“음, 아마 괜찮을 거야. 유타로는 나랑 보는 눈이 아주 비슷하거든. 내가 좋아하는 걸 그 녀석이 싫어할 리 없어.”

 

맙소사, 보쿠토 씨. 제발 그런 말 좀 가볍게 하지 마세요. 좋아한다는 말, 제가 마음대로 오해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그냥 내 마음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전해질 리 없는 마음이니 속으로나마 멋대로 오해하는 건 괜찮겠지.

 

“그럼 전 이만 갈게요. 맥주 잘 마셨습니다.”

“응. 아 참! 만나서 반가웠어, 아카아시. 진짜 보고 싶었거든.”

 

제발,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네, 저도 반가웠습니다. 늦었으니 쉬세요.”

 

방으로 돌아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오늘 있었던, 아니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이 다 꿈만 같다.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진짜로 꿈이었으면 어쩌지? 실없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걸 보니 정말 놀라긴 놀랐나 보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씻고 다시 누웠다. 꿈이든 뭐든 좋다. 앞으로는 보쿠토 씨를 계속 볼 수 있는 거잖아.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사람과 만났다. 절대로 마주칠 리 없을 거라 생각했던 장소에서 또 마주쳤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나의 오해는 시작되었다. 이 사람과 나는 정말로 운명인가 보다, 하는 웃기지도 않는 오해. 아무래도 내일 쏟아지는 햇살은 오늘보다 좀 더 아름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