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보는 순간, 네가 반드시 나의 빛이 되어 줄 거라고 믿었어.
- 오이카와 토오루
도쿄지검 특수부 소속 검사, 이와이즈미 하지메. 그는 벌써 며칠 째 야근에 시달리는 중이다. 요즘 들어 급격히 늘어난 살인 사건으로 인해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게다가 수법은 또 왜 그리 잔인한지. 온 국민의 분노를 묵묵히 받아내야 하는 건 고스란히 검찰과 경찰의 몫이었다.
왜 이렇게 빨리 잡지 못하는 것이냐, 똑같은 범죄가 대체 몇 번째인 것이냐, 도대체 사람이 얼마나 더 죽어야 잡을 것이냐.
하루에도 수십 통씩 걸려오는 민원 전화와 검찰청 홈페이지 게시판 글에 모두가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들이라고 해서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데. 수많은 증거와 목격자를 토대로 수사 범위를 좁혀 보았지만, 범인이라는 놈이 어찌나 용의주도한지 발끝도 볼 수가 없었다.
일본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은 희대의 살인 사건. 도쿄 중심지에서만 일어나는 이 사건은, 분명 번화가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목격한 사람이나 특별한 증거품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특별수사팀이 꾸려졌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이 수사팀의 팀장이 되었다. 밤낮 없이 경찰과의 협조하에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큰 수확이 없었다.
“에이, 그림자 같은 놈.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가 없는 놈이네. 젠장.”
이와이즈미 옆에 앉은 동료 검사가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았기에 이와이즈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수사보고서에 눈을 돌렸다. 벌써 피해자가 다섯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범인을 잡지 못하면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할 것이다.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열심히 보고서를 읽던 그가 문득 손목시계를 바라보더니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5분 뒤에 회의 시작합니다.”
그의 말에 따라 팀원들은 각자 조사한 내용을 정리하며 회의 준비를 했다.
수사팀 사무실 한편에 있는 작은 회의실. 팀원들과 팀장인 이와이즈미는 그곳에서 '도쿄 성범죄자 살인 사건'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다. 그들이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명명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다섯 명의 피해자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이들은 모두 성범죄 전과가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동이든 여성이든, 누구를 강간했든 상관없이 범죄를 저지들 남성들이 전부 살해된 사건입니다.”
“음, 피해자 다섯 명 모두 실형을 받아 감옥에 갔다 왔습니다. 징역살이를 한 시간은 다 다르지만 어쨌거나 죄에 대한 대가는 다 치르고 나온 놈들인데 굳이 왜 이렇게까지 했는지 모르겠네요.”
“수법이 매우 교묘하고 잔인합니다. 범행 과정으로 보아, 범인은 피해자들의 동선을 미리 파악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신 부검 결과 눈에 보이는 상흔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상도 많다고 하더군요.”
미친 새끼가……. 이와이즈미는 관자놀이를 꽉 누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사이코 같은 자식이 나타난 걸까.
“아!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손이나 발이 잘린 피해자들 중 살아있을 때 절단을 당한 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완전 미친놈이에요. 산 사람 손을 자르다니.”
“그것뿐인가? 하나같이 성기가 없잖아, 성기가. 얼마나 또라이인 건지.”
팀원들의 보고를 들으며 이와이즈미는 생각에 잠겼다. 일부러 성범죄자들만 노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게다가 특정 지역이 아닌 도쿄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건 또 왜인지. 하지만 두 번째 질문은 피해자들의 주소지를 보고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그들이 사는 지역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범인이 성범죄자들만 노리는 이유였다. 그야, 그들은 취급하기도 싫은 쓰레기 같은 존재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죽여도 되는 존재도 아니었다. 실형을 받아 감옥에서 복역까지 하고 나온 이들을 죽이다니.
“역시 복수인가? 그들에게 당했던 누군가가 복역을 마치고 나온 틈을 노린 게 아닐까 싶은데.”
이와이즈미의 말에 팀원 몇 명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 말씀도 일리가 있네요. 보통 이렇게 시신을 잔인하게 훼손하는 경우에는 보복성 살인이 많다는 통계가 있으니까요. 게다가 피해자 전원이 성범죄자이니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여성이나 그 여성의 가족 또는 지인에 의한 범죄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자, 일단 한 가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두고 생각해 봅시다. 한 가지만 놓고 생각하면 시야가 좁아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오늘은 우리도 좀 퇴근합시다. 벌써 며칠 째 집에 못 들어갔더니 도저히 못 참겠네요.”
검찰청 화장실을 샤워실 삼아 그곳에서 세수하고 이를 닦고, 간단히 머리까지 감으며 지냈는데, 이제 더는 못하겠다는 듯 이와이즈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그러자 팀원 모두가 펄쩍 뛰며 좋다고 동의했다. 그들 역시 이제는 집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차에 오른 이와이즈미는 핸들에 엎드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해 죽겠네. 범인 이 새끼 잡히기만 해봐! 반은 죽여 놓는다.
시동을 걸고 검찰청을 나선 그는 잠시 뒤 신호에 걸려 정차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도로에는 그의 차 외에 다른 차는 없었다. 나른한 시선으로 신호를 응시하던 그는, 문득 반대편 인도에서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키가 큰 웬 남자가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채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앞서 가는 남자는 고주망태가 되어 휘청휘청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의 뒤에 누가 오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그냥 보면 둘 다 평범하게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본능적으로, 모자를 쓴 남자를 수상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신호가 바뀌자 3차선으로 차로를 바꾸고 일부러 천천히 차를 몰았다. 거리를 두고 느리게 따라갔지만 안타깝게도 술에 취한 남자와 모자를 쓴 남자 모두 골목길로 쏙 들어가 버렸다. 마음이 급해진 이와이즈미는 급기야 차에서 내려 둘의 뒤를 밟았다.
오고 가는 차가 없었기에 그는 아예 무단횡단을 해 서둘러 골목길로 들어섰다. 떨리는 마음으로 두 남자를 바라보던 이와이즈미는, 술에 취한 남자가 휘청이며 그 자리에 주저 앉자 모자 쓴 남자가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목격했다.
깊게 눌러 쓴 모자에 두꺼운 후드티를 입은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다가 주저 앉은 남자에게 다가가며 천천히 손을 빼냈다. 거기까지 지켜본 이와이즈미는 더 기다릴 것도 없이 돌진해 모자 쓴 남자를 뒤에서 덮쳤다.
“으아악!”
비명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진 남자가 연신 '아야야.' 하며 맨바닥에 얼굴을 맞댄 채 엎드렸다. 이와이즈미가 뒤에서 힘으로 누르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윽, 대체 뭡니까? 누구신데 이러는…….”
“이봐, 너. 이 밤중에 왜 저 남자를 따라가는 거지?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무슨 짓은 무슨. 이것 좀 놓고 말하시죠. 누구신진 몰라도 크게 실수하시는 겁니다”.
남자가 무척 억울하다는 듯 말하기에 일단 이와이즈미는 그를 짓누르고 있던 힘을 조금 풀었다. 완전히 꺾은 팔까지 풀어주자 그가 일어나면서 꺾였던 팔을 흔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와, 진짜. 살다살다 별일을 다 당하네. 저 아저씨가 갑자기 픽 주저앉으니까 놀라서 도와주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사람을 뒤에서 덮쳐요?”
“……네?”
모자를 벗은 남자의 외모는 무척이나 곱상했다. 예쁘다는 말도, 잘생겼다는 말도 모두 어울릴 만큼 굉장한 외모. 그 얼굴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이와이즈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술 취한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분을 도와주려고 했다는 겁니까?”
“네. 그리고 아까 보니까 따라간다고 하셨는데, 진짜 이상하신 분이네요. 제가 왜 이 아저씨를 따라갑니까? 이런 아저씨 볼 게 뭐가 있다고. 저희 동네가 여기거든요? 그래서 온 겁니다.”
완벽한 오해였다. 무안해진 이와이즈미는 남자를 향해 미안하다며 몇 번이나 사과했다. 그리고 고주망태인 중년의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아저씨, 집이 어디십니까? 제가 모셔다…….”
“아, 그 아저씨 집 저기예요. 저 언덕 위에. 우리 동네 사는 아저씨라 제가 알죠. 가는 길에 모셔다 드리면 되니까 그냥 가세요. 괜히 또 사람 오해해서 넘어뜨리지 마시고요.”
여전히 불쾌한지 남자가 조금 날이 선 말투로 이와이즈미를 밀었다. 어쩔 수 없이 물러선 그는, 다시 한 번 사과를 한 뒤 옷을 털며 차를 세워놓은 곳으로 돌아갔다.
“너무 과하게 반응했나. 아, 제길!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스스로를 자책하며 차로 돌아간 그는 더는 멈추지 않고 집에 도착했다. 피곤과 스트레스가 쌓여 서둘러 씻고 잠에 빠져 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다음 날 아침, 검찰청에 출근해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팀장님, 여섯 번째 피해자가 발생했습니다!”
뭐라고?
하룻밤 사이에 또 피해자가 늘자 이와이즈미의 반드한 이마가 자동으로 일그러졌다.
“피해자, 이시다 케이토라. 55세. 오늘 새벽 2시 30분쯤 술에 취한 채 자택으로 돌아가다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인 오전 6시 경에 인근에 있는 빈 건물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시신 훼손 정도가 이전 사건들과 흡사하고, 역시 한쪽 손목이 절단된 상태였답니다.”
쾅-
“이런 젠장!”
이와이즈미가 거세게 자신의 책상을 내리쳤다.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고작 하루만에 또 늘고 말았다.
“저기, 팀장님…….”
팀원 하나가 그의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이전 피해자들과 똑같은 게 하나 더 있는데…….”
“뭡니까?”
“그…… 성기가 없습니다. 앞선 다섯 명의 피해자들 역시 몸의 다른 부위가 절단된 것 말고도 성기가 없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래도 진짜 보복 범죄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이시다 케이토라도 전과가 있는 사람입니다.”
“설마……!”
“네. 성범죄자였습니다.”
하! 정말 어이가 없군. 범인이 노리는 대상은 오로지 성범죄자뿐이라는 건가? 대체 왜? 네놈이 뭐가 그렇게 잘나서 전과자들을 죽이는 거지? 그들이 네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건데! 그들이 죽을 죄를 지은 건 맞다만, 더럽고 짜증나도 인간은 인간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거냐고!
“여기, 이번 피해자 사진입니다.”
사진 한 장을 건네받은 이와이즈미는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이 사람은……!”
“왜 그러십니까?”
“이 사람…… 내가 퇴근하면서 본 사람입니다. 술에 잔뜩 취해서 집에 가는 걸 봤는데…… 어떻게 이 사람이…… 하!”
자신이 봤던 사람이 피해자가 되어 나타나자 이와이즈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구할 수도 있었는데. 어쩌면 도와줄 수 있었을지도…… 아니, 잠시만. 도와준다고? 도와준다…… 도와준다라……!!
‘와, 진짜. 살다살다 별일을 다 당하네. 저 아저씨가 갑자기 픽 주저앉으니까 놀라서 도와주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사람을 뒤에서 덮쳐요?’
그래, 그 모자 쓴 놈! 내 기억의 마지막에는 그놈이 남자와 같이 있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뺐을 땐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 주머니 안에는 뭐가 있었을까? 정말 아무 것도 없었던 게 맞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와이즈미는 다시 한 번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놈이 범인이다. 틀림없어! 또 다른 목표를 노리고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내가…… 놓쳤다.
‘누구신진 몰라도 크게 실수하시는 겁니다.’
그래, 이 새끼야. 내 실수다. 그때 널 놓아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네놈 면상에 속았다!
그는 즉시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어제 그 골목길에 가면 아주 작은 무엇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끼이익- 요란하게 차를 세운 뒤 예의 그 골목으로 들어갔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새벽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뭔가 있을 거라고!”
이와이즈미는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골목 주변 어디에도 CCTV가 없었다. 단 한 대만 있었더라도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때문에 그는 터덜터덜 발길을 돌려 차로 향했다.
운전대에 팔을 올리고 머리를 박은 채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후우, 조금만 제대로 살폈더라면 한 명은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눈앞에서 범인을 놓치다니. 스스로를 책망하여 본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엎드려 있는데, 누군가 조수석 쪽 창문을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 검사님?”
“……네?”
자괴감에 빠져 슬며시 머리를 들자, 방긋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새벽의 그 남자였다. 어스름한 새벽보다 훨씬 더 말끔하고 정갈한 얼굴이었지만, 이와이즈미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고 당황했지만 미처 마음을 추스를 틈도 없이 남자가 불쑥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동도 걸지 않고, 거기다 문도 잠그지 않은 채 그냥 앉아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무, 무슨…….”
“잠깐만 자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뭐, 뭐하는…… 읍!”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남자가 억지로 틀어막은 입으로 들어오는 향 때문에 자꾸만 눈이 감겼다. 이 새끼, 진짜 범인이었어! 어떻게 해서든 버티려 바둥거리는 몸짓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1분도 채 되지 않아 정신을 놓았다. 한적한 길인데다 차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 이 장면을 목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자는 정신을 잃은 이와이즈미를 끌어당겨 조수석에 앉힌 뒤 자신이 운전석에 앉아 유유히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는 출발하기 전, 완전히 고개가 떨어진 이와이즈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우리 검사님, 요즘 나 때문에 잠도 못 자는 것 같던데. 안전하게 모실 테니 한숨 푹 자요.”
이와이즈미의 차는, 주인이 바뀐 채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장소로 떠났다.
' Written by. Sanzo > HQ!! 글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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