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우리 사이의 거리 - 4
보쿠토 코타로 X 아카아시 케이지
우리 사이의 거리
Written by. Sanzo
보쿠토 씨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느리게 앞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네를 타는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게. 다가갈수록 그의 표정이 진지해 보여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할 말이 있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회사에서 큰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온갖 상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보쿠토 씨.”
내 부름에 고개를 들었는데, 얼굴에 취기가 오른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통화할 때도 발음이 또박또박 했으니 취한 건 아닌 듯하다. 바로 코앞으로 갔음에도 과연, 술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다. 회식이라더니 생각보다 일찍 온 것도 이상하고. 그럼 뭐지?
“지금부터 내가 뭐 하나만 물어볼 건데, 솔직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보쿠토 씨는 그네에 앉은 채로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올곧은 눈빛, 진실을 얘기하라고 독촉하는 것 같아서 견디기 힘들다. 내가 감추고 있는 것을 다 알고 있기라도 한듯이.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네, 말씀하세요.”
담담한 척, 태연하게 말했다. 사실은 손끝이 떨릴 만큼 긴장하고 있지만 그런 티를 내서는 안 되니까. 보통 이런 경우,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하는 건 나고 어색하게 피하는 사람은 보쿠토 씨였다. 하지만 그 입장이 바뀌려 하고 있다. 보쿠토 씨는 무척이나 담백한 시선으로 나를 빤히 응시했고, 나는 그 눈빛을 견디지 못해 피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저번에 말했던 거 있잖아. 네가 좋아하는 사람 이니셜에 H가 들어간다고 했던.”
“그 얘기는 또 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아직 뭘 물어보지도 않았건만, 불쑥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러나 보쿠토 씨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오히려 더 목소리에 힘을 줘 묻는다.
“정말로 H가 들어가는 거 맞아?”
“…….”
“대답해.”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분위기로 봐서는 뭔가 알고 묻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럴 만한 여지를 준 적이 없으니 도통 모르겠다.
“맞습…….”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시 보쿠토 씨가 입을 열었다. 질문을 바꿀게. 네가 좋아하는 사람, 나도 아는 사람이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눈빛과 목소리가 모두 확신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쉽게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떨리던 손끝이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애써 침착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포커페이스마저 흔들렸다. 나는 어느샌가 보쿠토 씨로부터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보쿠토 씨가 그네에서 일어나 내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는 조금 강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날 봐, 아카아시. 내 눈 똑바로 보고 얘기해. 내가 아는 사람, 맞지?”
다리가 후들거려 더는 서 있지 못할 것 같다. 급격하게 무너지는 나를 보며 보쿠토 씨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잡고 있던 내 어깨를 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순간에도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쿠토 씨는 내 귓가에 대고 나긋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하지만 내가 더 많이 놀랐단 말이야.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꼭 너에게 확인을 해야만 했으니까.”
“대체 무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카아시, 나 좋아하지? 네가 좋아하는 사람, 나지?”
쿵쿵쿵-
내 심장에서 나는 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달음박질하는 심장의 고동이 현실적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빳빳하게 굳은 몸으로 한마디도 하지 못하자, 보쿠토 씨는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그렇다고 말해. 내가 들은 게 거짓말이 아니라고 하란 말이야. 응? 아카아시, 제발…….”
“……어, 어떻게,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말한 적 없는데…….”
이 이상 속이는 건 무의미하다. 아니, 더는 속일 수도 없다. 알게 된 과정은 모르겠지만 보쿠토 씨는 이미 내 마음을 눈치챘다. 그게 진실이다. 그러니 거짓말을 해도 더 이상은 소용이 없다는 거다.
“회식이 일찍 끝났어. 원래라면 식사한 뒤에 노래방까지 가야 하는데, 부장님이 몸이 안 좋으시다고 먼저 들어가셨거든. 남은 부원들끼리 놀라고 하셨지만 너랑 유타로가 궁금하고 보고 싶어서 그냥 왔어.”
보쿠토 씨는 나를 안은 채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도록 아무도 나오지 않아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유타로를 재우면서 너도 잠들었나 했거든. 근데 몇 발짝 들어가니까 뭐라고 얘기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유타로의 방 문이 좀 열려 있어서 들여다 봤는데, 그 다음은 알지? 너랑 유타로가 얘기하면서 막 울고 있더라.”
그랬구나. 역시 그때 본 거였어. 유타로를 달래며 속마음을 꺼내 놓느라 보쿠토 씨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처음엔 놀랐지만,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나 솔직히, 아카아시가 날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해서 속상했거든.”
“의외로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근데 보쿠토 씨도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아니라…….”
“너야.”
너야, 라는 한마디로 인해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는 줄 알았다. 그랬기에 조금 전 보쿠토 씨의 말에 항의를 하려고 했다. 당신은 내가 아니어도 되면서 왜 나는 당연히 당신을 좋아해야 하느냐고. 그런데 그게 아니라니.
“내가 널 좋아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였어. 학생 땐 오히려 몰랐어. 워낙 친하게 지내고 늘 가까웠기 때문에 ‘좋아한다’라는 개념을 잘 몰랐거든. 근데 졸업 후에 몇 번인가 널 따로 만나거나 하면서 깨닫게 된 거야. 저번에 말했었지? 너를 보러 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고. 그때는 그저 후배 소식이 궁금해서 간 것처럼 말했는데, 사실은 아니야. 진짜로 네가 보고 싶어서 간 거였어. 거짓말해서 미안해.”
나는 손을 들어 보쿠토 씨의 등을 감쌌다. 그리곤 그의 옷깃을 꽉 붙잡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회사에 합격한 날, 너에게 전화하려고 했었어. 정식으로 사귀자고 말하려고 그랬는데……. 미안, 미안해. 내가 그날 사고만 치지 않았어도 널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마음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유타로와 만났잖아요. 그거면 충분하니까 이제 괜찮아요.”
아까 유타로와 이야기하면서 한참을 울었기에 더는 흐르지 않을 것 같았던 눈물이 다시금 쏟아졌다. 내 안에 이토록 많은 눈물이 있었다니, 처음 알았다. 보쿠토 씨의 어깨에 기대어 그렇게 또 울었다. 서럽고 속상했던 기억을 눈물과 함께 흘려보내고, 앞으로 있을 행복한 나날로 그 빈자리를 채우겠다고 다짐했다.
가까스로 눈물이 멎었을 때, 보쿠토 씨가 나를 품에서 살짝 떼어 놓더니 슈트 상의 안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무릎을 굽혀 앉고는 꺼낸 물건의 뚜껑을 열었다.
“……!”
보쿠토 씨가 꺼낸 것은 붉은색 벨벳 재질의 반지 케이스였다. 케이스 안에는 반짝이는 보석 하나가 박힌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
“그…… 좀 급하게 준비하느라 싼 반지밖에 못 샀지만, 나중에 더 좋은 걸로 해 줄게. 그러니까 아카아시, 나랑 결혼해 줄래?”
이 사람은 대체……. 이제야 겨우 눈물을 그쳤는데, 또 날 울리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 이상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잘 울게 되었을까? 아마 오늘, 평생 쏟아야 할 눈물을 다 흘리는 게 아닐까 싶다.
게다가 프러포즈를, 한밤중에…… 그것도 동네 놀이터에서 하다니. 황당하면서도 나름 이색적인 것 같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보쿠토 씨 앞으로 왼손을 내밀었다. 막상 일은 저질러 놓고 혹시라도 거절당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지, 보쿠토 씨는 다가오는 내 손을 보고 곧장 화색을 띠었다. 그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손길로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너랑 유타로 얘기하는 거 듣고 바로 나와서 무작정 반지부터 샀거든. 서두르다 보니까 당장 가지고 있는 돈이 없어서 최대한 금액에 맞춰서 사긴 했는데, 조금만 기다려. 내가 빨리 다른 걸로…….”
“보쿠토 씨.”
“으, 응?”
변명하듯 반지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던 그가 내 부름에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지 마세요, 이걸로 충분하니까. 나는 정말로 만족했다. 반지의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준 것이냐가 중요하다. 보쿠토 씨가 주는 것이라면, 설령 게임 센터에서 뽑은 플라스틱 반지였다 하더라도 나는 기쁘게 받았을 것이다.
그래도 보쿠토 씨는 못내 아쉬운지 ‘하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전 이 반지가 마음에 들어요. 다른 건 필요 없으니 괜히 돈 쓰지 마세요. 아셨죠?”
마지못해 응, 하고 대답한다. 아마 보쿠토 씨는 모를 것이다. 내가 이 반지 하나로 평생을 살 힘을 얻었다는 것을. 그만큼 위력이 대단한 반지인데 달리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제 그만 들어가요. 아무리 자고 있다곤 해도 유타로 혼자 두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려요.”
“그래, 들어가자.”
그날 나는 보쿠토 씨의 집에서 잤다. 이번에는 유타로 없이 둘이서만 그 커다란 침대를 차지한 채 말이다.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를 꼭 안고 잠들어 있는 보쿠토 씨를 보는 건 이 세상 최고의 행복이었다.
**
요즘 들어 회사 동료들이 같은 질문을 자주 한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냐는 것이다. 한결같이 아니라고 했건만, 오늘도 또 물어보기에 왜 그러냐고 오히려 내가 반문을 했다. 그러자 옆자리 동료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들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조각에게 표정이 생겼다고 해. 늘 똑같은 표정만 짓던 조각이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그래서 뭔가 그럴 만한 일이라도 있었나 해서 물어본 거야.”
사람이 참 재미있는 존재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절대로 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단념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그저 유타로와 지내며 보쿠토 씨의 곁에서 머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마음이 통하자 금세 태도가 달라졌다. 세상 모든 것이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재미있을 수밖에. 뭐, 덕분에 동료들도 나를 좀 더 친근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하니 다행인 것이겠지.
퇴근을 한 뒤 습관처럼 유타로의 유치원으로 향했다. 유타로는 유치원 문 앞에 서서 노란색 가방을 맨 채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고, 목을 길게 빼고 내가 오는 길목을 바라보기도 했다. 시간이 되면 올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저렇게 기다린다. 그리고 나를 발견하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린 채 뛰어온다.
“엄마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고 심장이 떨리는 말. 유타로는 더 이상 나를 ‘케이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보쿠토 씨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바로 다음 날, 보쿠토 씨는 곧바로 혼인 신고를 하는 강행군을 펼쳤다.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을 정도였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다며 아주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식은 나중에 올리더라도 일단 네가 내 사람이라는 걸 확실하게 하고 싶어. 결국 나는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아니, 꺾지 않았다.
며칠 뒤 우리 부모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많이 놀라시긴 했지만 그동안 내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그 한 사람만을 원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계셨던 부모님은 감사하게도 우리의 사랑을 허락해 주셨다. 게다가 유타로까지 예뻐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다음은 보쿠토 씨의 부모님 차례였는데, 집에 도착해 막 신발을 벗는 순간, 방에서 나오신 어머님께서 나를 와락- 안으셨다. 당황한 채 굳어 있는 내게 하신 말씀은 ‘고맙다.’였다.
보쿠토 씨가 사고를 쳐 결혼한데다 아직 어린 아이를 두고 이혼까지 한 덕에 상심이 크셨던 부모님은, 속상한 마음에 유타로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으셨다고 들었다. 언제까지고 보쿠토 씨 혼자서 애를 키우며 살 줄 알았는데, 내가 나타났으니 부모님껜 구세주 격이 된 셈이다.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닌데. 나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은 것뿐이다. 그러니 내게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내가 감사하지.
“아카아시. 그래, 아카아시구나. 전화로 듣기는 했지만 오랜만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어. 그런데 얼굴을 보니 알겠구나. 학생 때 모습 그대로네. 바르고 착실한 모습 그대로야.”
어머님은 내 손을 잡고 감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기억해 주셨구나. 한두 번밖에 본 적이 없는데도 기억해 주셨어.
“우리 코타로 옆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맙다. 너도 알다시피 애가 변변치 못해서 네가 많이 힘들지도 모르겠구나.”
그러자 보쿠토 씨가, 제가 뭘요?! 라며 버럭했다. 하지만 아버님과 눈이 마주치자 금세 꼬리를 내렸다. 나를 받아 주시고 가족으로 맞이해 주신 것도 기쁘지만, 무엇보다 기쁜 것은 두 분이 유타로를 품으셨다는 것이다. 이제는 진정으로 사랑해 주실 마음이 드신 것 같다. 아니, 사실은 전부터 아이 자체는 사랑스러우셨겠지. 하지만 보쿠토 씨와 떠나 버린 친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에서 화가 치솟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나는 정식으로 보쿠토 씨의 아내가 되었다. 결혼식은 조금 더 지난 후에 올리기로 했다. 아직은 우리 둘 다 여유가 없으니까. 회사에도 직접 말을 하진 않았지만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모두 여러 가지 추측을 하고 있는 듯하다. 애인이 생겼다는 둥, 몰래 결혼을 한 게 아니냐는 둥 말이다.
“오늘도 재미있게 놀았어?”
“응! 그리고 우리 반 선생님이 나보고 좋겠다고 부러워했어.”
“뭐가 좋은데?”
손을 잡고 함께 보쿠토 씨의 회사로 가는 길. 어쩐 일로 일찍 끝날 것 같다며 회사 앞으로 오라고 아까 전화가 왔었다. 저녁을 먹고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엄마가 생겨서 좋겠다고. 이제 유타로도 엄마가 있으니까 맨날 자랑할 거야. 카레도 먹을 수 있고, 소시지도 해 주니까.”
뿌듯해하는 걸 보니 나도 기분이 좋다. 더 이상 유타로가 다른 아이들에게 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치를 보거나 마냥 부러워하거나 하는 건 없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보쿠토 씨 회사 앞까지 갔다. 아직 십여 분 정도 시간이 남아서 입구 쪽을 서성이며 기다리는데, 유리문 안쪽으로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 단 한 명,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대기업에 방문하는 사람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조금 화려하고 약간의 노출이 있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10cm 정도 돼 보이는 높은 하이힐까지 신고 로비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엄마, 우리 왔다고 아빠한테 말하자. 온 줄 몰라서 안 내려오나 봐.”
조금 일찍 도착한 것을 모르고, 오히려 보쿠토 씨가 늦는 거라고 생각한 유타로가 전화하자며 나를 재촉했다. 알았어, 근데 아빠가 일하시는 거 방해하면 안 되니까 문자로 하자. 타협을 보고 보쿠토 씨에게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내려오겠다는 답이 왔다.
“조금 있으면 내려오실 거야.”
“응응!”
아침에 헤어지고 나서 하루가 가기 전에 이렇게 일찍 다시 만나는 게 참으로 오랜만의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유타로는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작은 발을 움직이며 유리문을 힐끔거렸다. 그런데 그때, 드디어 보쿠토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온 그가 로비를 가로질러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문으로 나오려는데, 중간에 다른 사람에게 잡히고 말았다. 짧은 원피스 차림의 여자였다.
그녀는 보쿠토 씨의 팔을 잡아 가던 길을 막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 보쿠토 씨가 화들짝 놀라 그녀에게로 돌아섰다. 하지만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험악한 표정으로 잡힌 팔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두 사람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유타로의 친엄마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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